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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시 오는 봄


차라리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믿고 싶다. 이건 단지 소설일 뿐이라고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외면하고 싶다. 하지만 이 책은 ‘소설’의 형식을 빌린 다큐멘터리에 가깝다. 일본이 자행한 천인공노할 성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고발서다. ‘다시 오는 봄(양석일 글, 김응교 옮김, (주)페퍼민트 펴냄)’은 겉표지의 기다란 ‘봄’이란 글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책이다. 위안부 를 주제로 한 책 제목에 ‘봄’이라니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. 겨우 살아 돌아온 그 분들이 얼마나 힘들게 피눈물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짐작하기에 ‘봄’을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다. 재일교포2세인 작가는 일본인을 주독자층으로 정하고 위안부 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집필했다고 한다. 이 책은 위안부 를 소재로 하여 일본어로 쓰인 최초의 소설이다.빛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둠을 볼 수 없다. 어둠의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둠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한다. 그렇지만 어둠의 세계는 볼 수 없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. 작가의 역할은 어둠의 세계를 빛의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.(작가의 말) 위안부 를 소재로 한 영화 ‘귀향’이나 ‘아이 캔 스피크’를 보았지만 이 책의 텍스트가 주는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. 책을 보면서도, 읽고 난 후에도 울분과 충격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 할 정도로 힘들었다. 현재 피해자들이 고령이 되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계신다. 더 늦기 전에 일본 정부는 사과해야 한다. 미안하다고 해라, 제발. 미안하다고.“무슨 일이 있어도 사는 거야. 살아나가는 거야. 그게 우리들의 단 한 가지 희망이야.” (본문 p.211)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이 없어진다. 희망이 절망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었다. (본문 p.253) 피해자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데 온라인 서점의 이 책 이름 옆에 ‘절판’이라는 글자가 뜬다. 같이 기억해 주고 그 분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 사느라 바빠 지나치고 있나보다. 지난주에도 종로구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1381차 정기 수요집회가 있었다고 하니 이번에는 나도 걸음해 보려 한다.
피와 뼈 로 일본에서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거머쥐며 문단에 돌풍을 일으키고, 이후 계속해서 온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작품을 발표해온 재일작가 양석일이 ‘고통스러운 진실’, 아직 해결되지 못한 아시아적 고통의 문제를 들고 왔다. 바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이른바 ‘종군 위안부’, 즉 일본군 ‘위안부’로 살아야 했던 조선 여성들(혹은 아시아 여성들)에 관한 이야기다.

다시 오는 봄 은 한국 문단이 거의 외면해왔던 이야기를 철저한 자료 조사에 기초해 사실적으로 재구성한다. 2010년 방한한 양석일은 자신의 소설세계와 더불어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밝힌다. 일본에선 시바 료타로처럼 권력을 대변하는 영웅 이야기를 주로 쓴 소설가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, 작가라면 모름지기 약한 자,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. …… 한/일 간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. 역사를 제대로 보고 그것이 현대에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살펴 양쪽이 가진 편견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고 싶다.

주인공은 열일곱 살 처녀 ‘김순화’다. 이 소설은 1938년 고향에서 일본인 순사의 말에 속아 난징으로 끌려간 순화가 첫날부터 쉰여섯 명의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것을 시작으로, 약 팔 년간 난징에서 상하이, 싱가포르, 미얀마 랑군, 만달레이, 메이묘, 라시오, 바모, 미트키나, 라멍 등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던 전장으로 끌려 다니며 일본군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‘위안부’의 삶을 여과 없이 기록한다. 소설은 한 ‘여자’로서 능욕당한 순화의 삶과, 어둠의 터널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 끝에 있을 빛을 더욱 희구하게 되는 ‘인간’ 순화의 심리적 여정을 추적한다.